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 이후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시기스문드에게 폴란드 군을 돌려보내고 시기스문드만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스웨덴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그리고 비록 시기스문드는 여전히 스웨덴 국왕으로서의 대우는 받았지만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AD 1598년말 폴란드로 도망치듯이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스웨덴 왕위가 공석이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스웨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AD 1599년부터 칼이 반대파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하여 우선 린셰핑 조약이 체결될 때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야코브 네프가 달라르나에서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사생아인 칼 칼손 옐렌히엘름에게 토벌당했다. 또한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웁살라 대주교 아브라함 앙에르마누스를 투옥시켰고 여전히 시기스문드를 지지하던 [[칼마르]]를 공격했으며 수개월 간의 공선전 끝에 5월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스웨덴 의회가 시기스문드의 공식적인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스웨덴에서 루터교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조건으로만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와 별도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시기스문드의 편으로 남아있던 핀란드의 요새들을 공격하여 AD 1599년 8월 모두 제압했다. 그리고 11월 포로로 붙잡혔던 핀란드의 시기스문드 지지파를 모두 처형하는 '오보 대학살(Åbo Bloodbath)'을 일으켰다. 그리고 AD 1600년 2월 스웨덴 의회는 시기스문드에게 보냈던 최후통첩의 시한이 종료될 때까지 별다른 회신을 받지 못하자 그대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새로운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인정했다. 이후 칼 9세는 3월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스웨덴 귀족 5명을 처형하는 '린셰핑 학살(Linköping Bloodbath)'을 다시한번 일으키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제 [[에스토니아 공국#s-2|스웨덴령 에스토니아]] 만이 유일하게 시기스문드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시기스문드와 다시 벌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